갤러리로터스 | 박홍순 사진전: 대동여지도 계획 다섯번째 _ 강江, 스스로 그러하다

 2014. 6. 19 – 9. 30.
월-금 9:30-17:30 | 토, 일, 공휴일 휴관
파주출판도시 열화당 사옥 1층 갤러리 로터스
 

사진은 어떻게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하는가?

이영준

불가능하다. 사진으로 강물을 흐르게 한다는 것은. 사진 속의 강물은 정체된 채 꾸물거리고 있다. 강의 본질인 흐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강은 근본적으로 사진 찍기 힘든 피사체다. 강은 짧게는 몇십킬로미터에서 길게는 몇백킬로미터까지 긴 줄기로 뻗어 있는 흐름인데, 그것은 카메라의 프레임에 담을 수 없을 만치 유장하다. 낙동강이란 강원도 태백시 천의봉에서 발원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길이 513킬로미터의 강인데 그걸 어찌 카메라에 담는다는 말인가. 강 스스로 자신을 담을 수 없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말이다. 그래서 강을 찍으려면 수사법으로 말하자면 제유법(提喩法)을 쓸 수 밖에 없다. 하나로 전체를 대표하는 방법 말이다. 학급에서 반장을 뽑아서 전체를 대표시킨다고 해도 그가 학급 전체 인원들의 세세한 요구마저 다 대변할 수 없듯이, 어떤 하나를 고른다고 해도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사진 몇 장으로 그 긴 강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유법이 하나만 보여주면서 전체를 보여준다고 속이는 조삼모사 같은 수법이 되지 않으려면 보는 쪽에서 하나를 통해 전체를 짚어보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더군다나 사진 같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는 매체에서는 더 그렇다. 따라서 만 가지 굽이를 가진 강을 일부분의 모습만으로 봐도 전체를 상상해내고 그려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안목을 갖추려면 강을 접한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필자는 다행스럽게도 박홍순의 사진에 나오는 산줄기와 강줄기를 따라 트레킹을 한 경험이 있어서 박홍순을 끌어당긴 자연의 힘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강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을 때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카메라를 들이댄 그 동기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유장한 강의 흐름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자신이 그 강가에서 비릿한 물냄새를 맡았었다는 현존성의 증명으로는 쓸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박홍순에게 카메라란 한 인간의 한정된 안목으로는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는 강에 다가가기 위한 방편이다. 그는 카메라를 통해 강의 사람이 된다. 강에 가면 뛰어들어 수영 하는 사람, 낚시찌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사람, 물속의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 끓여먹는 사람, 그걸 팔아서 돈 버는 사람, 다리를 놓는 사람, 기슭의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 중장비를 동원해서 파괴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강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며 강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인간이 환경에 대해 하는 일은 대부분 파괴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 정, 인간의 행위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서부터 수중보를 놓는 것까지,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박홍순처럼 카메라를 세워 놓고 사진 찍는 행위는 가장 덜 파괴적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강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이미지의 차원과 더불어, 강에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행위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 왜냐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유명한 장소에 우르르 몰려가서 비싼 카메라로 수십 명이 같은 노출로 사진 찍는 행위가 설사 환경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렇게 훌륭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박홍순_낙동강-경남 김해시 한림면 #01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120cm_2013

사진이라는 예술이 미술이나 문학, 음악 등 다른 예술에 비해 가지는 장점은 카메라를 매고 직접 환경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강을 찍으려면 강가를 따라 걸으며 강을 파악해야 하고 좋은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스냅사진 찍듯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강을 사랑하고 강에 몸을 푹 담가서 물비린내에 젖을 정도로 강을 겪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진가는 강의 길이와 굴곡을 체험하고 다리는 뻐근하고 발은 욱신거린다. 그게 강이 내 몸에 들어앉았다는 증거다. 그제서야 강은 자기 모습을 내 카메라에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은 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강을 사진 찍는다는 것은 내가 강을 체험하고서 생기는 부산물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도 대상을 대체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열심히 사진 찍는다고 해도 강의 유장함을 닮기는커녕, 흉내 조차 낼 수 없다. 사진가는 위대한 대지에 대한 오마주의 작은 징표로 사진을 남길 뿐이다.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이라거나,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 사진’이라는 말은 피사체의 위대함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강이 아프다. 물론 자연환경이라는 것이 항상 건강한 것은 아니다. 자연은 벼락 맞아서 산불이 나기도 하고 홍수로 강이 넘쳐서 유역이 유실되기도 하고, 생태환경의 천이로 어떤 종은 사라지고 새로운 종이 도입되는 등 다양한 변화 속에서 병이 나기도 하고 스스로 치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연이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정능력이 기능할 정도의 병일 때 뿐이다. 자연도 말기암에 걸리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 혹은 병의 양상이 자연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할 때도 자정능력은 기능하지 못한다. 지금의 강들이 그렇다. 박홍순이 사진 찍은 강은 순수한 자연물이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결합물, 더 정확히 말하면 자연에 인공이 가해져서 변형되고 상처 입고 혹은 재탄생한 모습이다. 그래서 치유가 어려운 것이다. 자연상태의 강은 단순히 물의 흐름만은 아니다. 강물은 흐르면서 지형을 파고든다. 그래서 골짜기가 생기고 모래톱이 생긴다. 땅의 어떤 부분은 강물의 흐름에 따라 깎여나가고 어떤 부분은 흙이 쌓여서 높아지기도 한다. 강은 물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힘이며 그 힘은 주변의 땅에 고스란히 작용한다. 그 힘으로 생겨난 땅에는 수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온갖 동물들이 서식한다. 강을 걷다 보면 노루, 고라니, 너구리같은 동물들은 비교적 흔히 보게 되고, 수달의 발자국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색깔과 모양이 다른 똥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삵이나 다른 동물들도 밤새 다녀간 것 같다.

박홍순_낙동강-경북 구미시 도개면 일선교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120cm_2013

그런데 박홍순은 그 강에 너무 늦게 갔다. 산도 마찬가지다. 그는 백두대간이 온전히 있을 때 가지 않고 도로와 채석장, 골프장을 만든다고 흉하게 깎여나가기 시작할 무렵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온전히 있던 무렵 그걸 찍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사진가들이 백두대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개발로 그 허리가 끊어져가던 1990년 후반 이후의 일이다. 하긴 그 전에 백두대간을 주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우선은 산이 온전히 제모습으로 있을 때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굳이 저걸 사진 찍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백두대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사라질 무렵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백두대간의 온전한 모습이 사라질 무렵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장롱 속에 십년간은 쳐다보지도 않은 낡은 옷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옷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갑자기 그 옷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새삼스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을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은 상실이었다. 사람은 자기 눈앞에 매일 같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사라지기 시작할 무렵 눈에 띄게 되고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가서 허둥지둥 찾는다. 사실 산이나 강이 사라진지는 꽤 됐다.

그러나 21세기에 와서 강이 사라지는 양상은 그 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전까지는 개발독재에 의해 산과 강이 깎여나갔다. 그 양상은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산의 한 구석에 골프장을 만들거나 케이블카를 짓는 정도였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하기 위해 애 쓴 흔적도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독재보다 강하고 전면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본이 자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강이 사라지는 양상은 총체적이다. 한국의 주요한 강 네 개를 골라 통째로 없애 버리는 식이다. 이 말은 인문학을 살린다며 신세계 정용진회장의 말을 떠올린다. 그전까지는 마켓 셰어를 올리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제부터는 라이프 셰어, 즉 소비자의 삶에서 신세계가 차지하는 비중을 높이겠다고 한 것이다. 즉 소비자가 자나깨나 신세계만 생각하고 무엇을 할 때든 신세계를 통해서 하도록 그의 뇌리와 관습과 감각에 신세계를 채우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모골이 송연하게 끔찍한 생각이 자연에 눈을 돌리면 환경재앙이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갈대로 뒤덮인 강가건 희귀종 동식물이 서식하는 산기슭이건 모든 땅이 다 잠재적인 자본가치 증식의 터전인데 가만 놔두면 안 된다. 모든 자연환경은 다 자본으로 전환되야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 전면적이며 세부적인 변형을 통해 자본화하는 것이 21세기 자본의 관심이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듯이 금융자본이 붕괴하기 시작하니까 대체재로 찾은 것이 자연자본의 개념이다.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그렇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증식을 위해 모든 종류의 변형과 파괴에 몸을 허락해야 하는 재료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의 변형과 파괴는 대단히 폭력적이다. 그 폭력 앞에 ‘순수한 자연’이라는 말은 싸구려 광고에나 나오는 빈 껍질 같은 클리셰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들 존재의 고향인 자연이 클리셰가 되버린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이 클리셰가 되버려 의미도 없는 싸구려 기호로 전락해 버렸다면 그 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자연의 파괴가 가져오는 상실은 단순히 흙이나 바위나 맑은 물이 사라진 것 이상의 상처를 가져 온다. 그것은 우리가 돌아갈 궁극의 고향이 사라진 것이다.

박홍순_금강-충남 논산시 성동면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120cm_2013

박홍순의 사진은 이런 중대한 상실에 대한 대응이다. 앨런 세큘라는 해양에 대한 비평적인 책『Fish Story』에서 바다의 상실에 대해 쓰고 있다. 사실 우리가 겪는 바다는 기껏 해야 해수욕장 가서 보는 연안 밖에 없다. 우리는 풍랑이 치는 바다, 노동의 바다, 과학의 바다를 볼 일이 없다. 대양은 더욱 볼 일이 없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물자들을 나르는 화물선이 정박하는 부두도 볼 수 없다. 바다는 기껏해야 피상적인 이미지로만 남을 뿐이다. 앨런 세큘라는 이런 현상을 개탄하면서 오늘날 얍삽한 데이터의 홍수 속에 인간이 물질과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가 개탄한 바다의 상실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땅의 상실이나 강의 상실에 비하면 한낱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일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땅과 강이 정말로 사라지고 있다. 1년에 여의도 면적의 수십배에 달하는 산이 사라지고 있으며 주요한 강들은 4대강 살리기 사업 한다고 다 파헤쳐지고 망가져 버렸다.

역사에 전례가 없는 자연파괴 앞에서 개인은 너무나 무기력하다. 산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파괴는 트라우마적이다. 필자가 스키와 골프를 안 하는 이유는 산을 깎아 만든 스키장과 골프장의 모습이 생살을 깎은 듯 상처로 다가와 쳐다보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살이 잘라져 나간 것을 쳐다보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런데 박홍순은 파괴된 자연을 쳐다보고 있다. 어떤 때는 쳐다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사태를 직시하란 말이요!”하는 요구는 그런 용기를 요구하는 태도이다. 박홍순은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사라진 산과 강을 사진으로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땅과 강의 상실을 카메라로 막는다.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상황은 그 반대이다. 굴삭기로 망친 것을 카메라로 되돌려 놓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박홍순은 그런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것도 아니고, 환경운동을 벌이자는 주장도 아니다. 그는 사진의 말 없는 증언기능을 활용하여 강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원래 사진 자체는 말 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證言이 불가능하다. 증언이라는 말에 이미 말씀 언(言)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데 말 없는 증언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진이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어떤 현장에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의 사진은 강물 냄새의 흔적일 뿐이다. 사실 강이 바다나 호수 같은 다른 물과 크게 다른 점은 물에서 특유의 비린내가 난다는 점이다. 이른 새벽 밤새 술을 푼 쓰린 속을 부여잡고 강가로 나가면 헝클어진 머리를 깨우는 것은 그 비린내다. 그런데 감각의 층위 하나만으로는 강을 증언하기는 힘들다. 또 무엇이 필요할까?

박홍순_낙동강-경북 칠곡군 북삼읍 01_2013 100x200cm C- Print 2014.

다시『Fish Story』얘기. 세큘라의 지식인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중층결정된 항구를 사진 찍을 생각 없느냐”고.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이란 어떤 사물이나 표상이 생겨나는데 여러 겹의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을 말 한다. 마르크스가 토대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 즉 물질적 토대가 상부구조인 정신문명이나 문화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이 비판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루이 알튀세가 만든 개념이 중층결정이다. 자본은 상부구조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겹의 요소들과 층위들을 통해서 결정한다. 이 개념은 알튀세 혼자서 만든 것이 아니라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꿈에서 나타난 표상은 한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겹의 요인들이 한꺼번에 작용해서 나타난다고 말 한 바 있다. 따라서 세큘라가 찍은 바다는 그냥 바다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고 정치고 권력이고 지식이고 투쟁이고 문화의 바다다.『Fish Story』는 단순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생선을 낚는 어부의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다에 얽힌 노동과 정치, 지리와 지식의 역학관계를 다루고 있다. 세큘라가 찍은 항구들은 이미 중층결정돼 있지만, 그의 책 또한 중층결정돼 있다. (필자는 그의 사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별로 사진답지 않다) 세큘라와 상관없이, 박홍순의 강은 이미 중층결정돼 있었다. 강기슭의 모래가 여러 겹의 켜로 되 있듯이 말이다. 이미 한국의 강은 그냥 물의 흐름이 아니라 정치고 경제이며 권력관계의 쟁투가 벌어지는 무대였다. 오늘날 사대강을 둘러싼 논란이 생기는 것은 그런 역사적 중층결정의 한 켜일 뿐이다. 그래서 사진가가 다가가기 더 힘들어진다. 강의 중층결정돼 있는 상태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나타내느냐 말이다.

그런 중층결정돼 있는 문제를 이론처럼 독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는 식의 사진작업이 효과적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사진은 서술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박홍순의 사진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강을 어떻게 진실되게 묘사하느냐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진은 강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수행성(performativity)의 문제이다. 수행성이란 점에서 봤을 때 많은 사진들은 거의 역할이 없다. 어떤 의미를 띠고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걸려 있지만 정작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진은 ‘걸려서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자극을 준다’는 정도의 최소한의 역할 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질문은, 박홍순의 사진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강과 대지에 대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박홍순이 강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낚시질 하는 것도, 수영 하는 것도,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강을 자기 나름대로 사랑하는 방식이다. 박홍순은 카메라를 택했다. 수도자처럼 카메라를 매고 강가를 걷는 것은 강이 입고 있는 문명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행위와 비슷하다. 강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사진으로 강을 묘사하는 행위에 우선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묘사하는 것이지 묘사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가 자식의 못난 면까지 사랑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박홍순의 사진에 나오는 강 주변의 이질적인 것들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원래 박홍순이 강을 찍었을 때는 오늘날 강이 겪고 있는 상처와, 그로 인해 변형된 강의 모습에 주목한 것이었다. 그 사진 속에서 콘크리트 교각들, 사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보들, 파헤쳐진 흙들은 부정적인 상처의 기표로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 속에서 이런 물건들은 결코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진 속에서 강물과 나무와 갈대와 잘 어울리고 있다. 강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강을 괴롭히는 요소들도 자연스레 강에 섞여서 강화(江化)된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박홍순의 사진은 오늘날 강이 입고 있는 상처를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긴 세월 동안 강을 바라보겠다는 결심에 대한 약속이다. 이 사진 속에서 콘크리트 괴물들이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미래에 그것들이 변해서 나타나게 될 모습을 이미 품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콘크리트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몇십년만 지나면 삭아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바위가 된다. 지금 사진 속의 강화(强化) 콘크리트가 제 아무리 뻔뻔하게 미끈한 다리를 뽐낸다 해도 몇십년만 지나면 신라 왕릉에 세워 놓은 사자상 처럼 둔한 질감으로 퇴화되고 완벽히 강화(江化)될 것이다. 박홍순의 사진은 그 때를 기다리는 침착함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렇게 강에서 차분한 물소리가 날 수가 있는가? 결국 그의 사진은 강물을 다시 흐르게 한다. 강물이 다시 흐를 먼 세월을 기다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백두에서 낙동강까지(2014,SPACE22)』는『대동여지도-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로 1999년「백두대간(조흥갤러리)」을 시작으로 「한강」,「서해안」,「남해안-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연작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국토순례여정의 과정 중에 한 작업이다. 『대동여지도-계획』이란 제목으로 1997년부터 17년간 이어져온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며 이번 작업 이후에도 ‘DMZ-남한의 북쪽’과 ‘섬진강’ ‘동해안’ 그리고 ‘우리바다의 섬들’ 나아가선 북녘의 산하까지도 향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긴 여정의 작업인 것이다. 이번 전시『백두에서 낙동강까지』는 ‘낙동강’ ‘영산강’ ‘금강’ ‘한강’의 ‘사대강’을 중심으로 한 작업인『강(江), 스스로 그러하다』의 작품들과 이전 작품들을 함께 전시해『대동여지도-계획』의 연장선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강(江), 스스로 그러하다(2014, 갤러리 로터스)』의 작업들은 사대강의 공사 중인 광경과 공사후의 풍경을 그 소재로 공사 중인 작품은 흑백 Gelatin Silver Print로 공사 후의 작품은 칼라 Print로 20여 점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어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사대강’의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박홍순

박홍순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전공 졸업

개인전
2012 <대동여지도-계획 중간보고서>, 한미사진미술관, 서울홍익대 독어독문학과
2010 <Paradise in Seoul>, Lexus, 대구
2008 <서해안>,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2007 <Paradise in Seoul>, 미네르바갤러리, 경기
2007 <Paradise in Seoul>, 성곡미술관, 서울
2006 <꿈의 궁전>, 서동갤러리, 광주
2006 <꿈의 궁전>, 쌈지길갤러리, 서울
2005 <한강>, 노암갤러리, 서울
1999 <백두대간>, 조흥갤러리, 서울

사진집
2012 《대동여지도 중간보고서》, 서울: 한미사진미술관
2001 《토착과 자생》, 서울: 월간미술
1999 《백두대간》, 서울: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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