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옛집, 지혜로운 삶의 공간_한옥문헌전 | 전시 서문

우리 전통문화의 기록과 공유를 위하여
이기웅(李起雄) 열화당책박물관 관장
오십 년 전 출판 분야에 몸담은 이래, 나는 우리 살림집과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토속문화와 고문화의 양상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 중 하나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해마다 열리는 도서전에 참여하는 것이다. 2013년에는 한글, 2014년에는 한식(韓食), 2015년에는 한복(韓服)을 특집으로 하여 관련 문헌들을 가지고 도서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2016년에는 한옥(韓屋) 관련 문헌으로 라이프치히 도서전에 참가할 예정이다. 
2015년 열화당책박물관이 개최하는 「우리 옛집, 지혜로운 삶의 공간: 한국의 전통가옥 문헌전(文獻展)」은 그 사전 연구 작업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그간 한옥 관련 문헌사(文獻史)를 정리해 보고, 한옥 연구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인지하고, 앞으로의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하자 하는 것이 기획의도이다.
유년시절부터 성년에 이르도록 내가 자란 삶의 터전이 전통 살림집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 주는 유서 깊은 선교장(船橋莊)이었다. 삼백 년 선교장의 역사 위에 나의 오대조이신 오은(鰲隱) 할아버지께서 의미심장한 문화공간인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을 건축한 것은 1815년, 올해로 꼭 이백 년이 된다. 선조께서는 이듬해인 1816년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을 세우셨다. 선교장 건축에서 용(龍)의 두 점정(點睛)이 바로 열화당과 활래정이며, 이는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형안(炯眼)이기도 하다. 이 유서 깊은 열화당의 건립 이백 년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7월 27일 선교장에서 ‘선교장 열화당 20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광복 후인 1948년 무렵, 선교장에서도 ‘웃댁’이라 일컬어지는 내가 살던 집의 사랑채가 가친(家親)에 의해 새로이 영건(營建)되던 때가 생각난다. 동네 장정들이 농주(農酒) 잔을 기울인 다음,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새 집이 들어설 터를 다지기 시작한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커다란 다짐돌에 여러 가닥의 밧줄을 건 다음, 그것들을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터를 다진다. 다질 때 선창(先唱)하는 사람에 따라 일동이 노랫가락을 드높이 따라 부르며 서로 흥을 돋우는 광경이 밤이 이슥하도록 이어진다. 어린 우리들은 이런 풍경을 즐기다가 밤늦은 시간이 되면서 졸음을 못 이겨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던 추억이 아른거린다. 그때 듣던 노동요(勞動謠)를 ‘덜구질 소리’라 한다. 강릉 지방에서 묘를 쓸 때 봉분을 다지면서, 또는 집 지을 때 집터를 다지면서 부르던 노래로, 그 집 주인의 가세(家勢)가 크게 일고 아들 많이 낳아 복 받으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당시 가친께서는 재목과 기와를 비롯해 자재를 마련하는 일을 도맡던 우리 집안의 지관(地官)과 함께 집 지을 계획을 세우고 주춧돌을 묻고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를 얹은 다음 지붕을 씌우고 직접 상량문(上樑文)을 쓰셨다.
양옥은 밑으로부터 쌓아올리지만, 한옥은 먼저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고 지붕을 하여,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 짓는다. 양옥은 비가 내리면 집짓기를 멈추지만, 한옥은 비가 와도 쉬지 않고 짓는다. 집의 골격이 마련된 다음, 방에는 품격있는 도배 장판이 이어지고, 벽에는 명서화가들의 그림과 글씨가 걸린다.
한국의 전통문화 가운데 특히 건축에 관한 나의 관심은 한옥 관련 책을 발간하는 일로 이어졌다. 내가 국립중앙박물관회 임원을 맡으면서 인연이 된 이건무(李健茂) 선생의 부탁으로, 2008년 문화재청의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 발간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옥과 민속마을’을 정리하는 출판 작업을 열화당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2010년 출간된 이 문화재대관은 우리나라를 세 권역으로 나누어, 첫째권 ‘경기(京畿)·관동(關東)·호서(湖西) 지역’, 둘째권 ‘영남(嶺南) 지역’, 셋째권 ‘호남(湖南)·제주(濟州) 지역’으로 엮었는데, 사진작업은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 서헌강(徐憲康) 선생이 맡았다.
문화재청과의 전통가옥 출간 사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과 그 보존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고, 그것을 위한 기념 출판물 하나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서헌강 선생에게 작고 아담한 사진집 하나를 만들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그 결실이 2015년 열화당에서 발간된 『한옥(韓屋)』이다.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옥 가운데 우리 고유의 형식으로 지은 집을 ‘한옥’ 또는 ‘전통가옥’이라 한다. 특히 전통가옥이라 부를 때의 ‘전통’은 양식(洋式)이나 중식(中式), 일식(日式) 등 외국의 건축양식과는 구별되는 전래의 양식을 의미하며, 시기적으로는 대략 19세기 말 개항기(開港期) 전까지의 가옥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통가옥은 우리 생활에 알맞게 지어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각 지역 고유의 자연적 인문적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발전해 왔다.
전통가옥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짓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특히 풍수지리는 산세(山勢), 지세(地勢), 수세(水勢) 등을 판단하여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키는 이론으로, 집을 짓는 데 철저하게 적용되었으며, 이에 의거하여 집 주인은 자신의 삶에 가장 알맞은 터를 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집을 짓는 데 풍수지리 못지않게 영향을 받는 것이 기후적 요인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춥고 긴 겨울에 거처할 따뜻한 온돌방, 특히 안방이 중요시되었고, 더운 여름에 거처할 마루방과 대청,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나들 부엌이 어떤 형태로 결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평면이 설계되었다.
조선시대의 대가족제도에 따라 가옥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별당 건물들이 줄줄이 세워졌으며, 철저한 남녀유별 의식과 내외법(內外法)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주거 공간인 안채와 남자들의 주거 공간인 사랑채가 따로 구분되어 건축되었다. 그러나 남녀유별의 관념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무너지기 시작해,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막았던 담이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로 옮겨지고, 사랑채를 안채에 이어 붙이기도 했다.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가옥에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집안에 사당(祠堂)을 두는 것이 필수였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공경(公卿)으로부터 하사(下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묘(家廟)를 세워 선대를 제사하고, 가묘가 없는 백성은 정침(正寢)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가옥을 지을 때 가장 높은 곳에 사당 터를 먼저 잡고 다른 건물보다 높이 세웠으며, 한번 세우면 헐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사당을 집안의 신성한 구역으로 여겼다.
조선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건국 초 신분 계급에 따라 땅을 나누어 주었고, 세종 때에는 신분에 따른 가사규제(家舍規制)를 정하여, 대군(大君) 육십 칸에서부터 서민 열 칸에 이르기까지 차등을 두어 가옥을 건축하도록 했다.
또한 웃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은 가옥 구조에도 철저히 적용되어, 공간 명칭도 사랑채의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은 큰사랑, 아들의 방은 작은사랑, 안채의 시어머니 방은 안방 또는 큰방, 며느리 방은 건넌방 또는 머리방이라 불렀으며, 규모도 부모의 방은 각각 두 칸으로 아들, 며느리 방의 두 배 크기로 짓고,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다락, 골방, 벽장 등의 각종 부속 시설도 두었다.
이러한 신분에 따른 적용이 하인들에게는 더욱 철저히 지켜졌으니, 아랫사람들이 따로 살도록 안팎 행랑채를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흔히 행랑채는 가운데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는데, 살림의 규모가 커서 행사나 제사 등이 많은 상류가옥은 행랑채만 십여 칸에 이르며, 스무 칸에 이르는 집도 있다.
전통가옥의 내부 공간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나뉜다. 안채는 주로 아녀자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가옥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며,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등으로 구성된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가옥의 가장 앞쪽에 자리한다. 보통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위치하며, 사랑방, 대청, 침방 등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침방은 철저한 내외법에 따라 바깥주인이 평상시에 잠을 자는 곳으로, 침방이 없는 경우에는 사랑방을 침방으로 사용했다. 이 사랑채는 조선 중기 이후 그 영역이 확대되고 기능 분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16세기 이후 종법질서(宗法秩序)가 확립되고 성리학적 생활문화가 정착되어 가장권(家長權)이 강화되는 등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이 증대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전통가옥의 외부 공간으로는 별당, 행랑채, 마당, 외양간, 장독대 그리고 정자 등이 있다. 이 중 별당은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가의 개별적 성격을 보여 주는 시대적 특성의 하나로 볼 수 있는데, 사랑채의 기능이 확대되어 기존 공간으로는 제사, 학문, 접객, 수양 등의 다양한 일들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가옥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형태와 구조가 변모된다. 특히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계기로 그동안의 양반과 상민의 계급 차별이 없어지고 주거생활에서도 조선시대 초기부터 적용되어 오던 가사규제가 사실상 철폐됨으로써,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을 뜨고 재력을 키워 온 중인 계층에서 신분제에 의한 가옥 크기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재력에 따라 건축 규모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집이라는 특성상 사람이 거주해야 온전히 보존되기도 하지만, 현대생활과 맞지 않는 구조 탓에 거주로 인해 훼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은 과거의 건축물이 현대에도 잘 보존되도록 문화재 관리 정책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에 관한 안타까움 때문에 그것을 책으로 기록했듯이, 한옥 관계 문헌 전시를 여는 것도 이러한 생각 속에서 우리 문화를 아끼는 사람들과 소통과 공유의 장을 만들어 가기 위함이다.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전시 연계 특강도 마련했다. 이 강좌를 통해 우리의 전통건축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자리를 빌려 특강을 허락해 주신 이상해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전시가 한옥의 진정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을 희망하며, 앞으로도 열화당책박물관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문헌 전시를 지속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여러분의 많은 애정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끝으로 이 전시에 문헌으로, 조언으로 도움을 주신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회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화봉책박물관, 한옥문화원, 여러 출판사 등 기관과 개인 소장자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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